
"이거 그랜저값 아니냐?" 최근 중고 매물을 살펴보던 딜러 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화면에 띄운 차는 2023년식 무사고 벤츠 전기 세단이었는데, 가격만 보면 도저히 벤츠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문제의 차종은 메르세데스-벤츠 EQE다. 내연기관 없이 처음부터 전기차로 설계한 벤츠의 첫 독자 플랫폼 세단으로, 출시 당시 신차 가격은 1억원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 지금은 국산 대표 세단인 그랜저 최상위 트림과 비슷한 값에 팔리고 있다.
중고차 플랫폼 '첫차'의 시세 분석에 따르면 EQE 350+ 2023년식은 5790만~680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1억380만원이었던 신차가를 기준으로 보면 딱 1년 만에 44%가 사라진 셈이다.
CATL 배터리를 얹은 EQE 300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9200만원이었지만 지금은 6400만원대, 일부는 5000만원대 매물까지 나온다.
화재 사고 하나로 브랜드 전체가 흔들렸다

이 정도 감가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 인천 청라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그 진원이 벤츠 EQE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전기차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까지 번졌다.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화재 앞에서, 소유주가 고스란히 그 책임과 불안을 떠안아야 한다는 정서가 퍼졌다. 결국 중고차 딜러들조차 매입 자체를 꺼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1억원짜리 차를 산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브랜드가 보장하는 안전을 함께 사는 일인데, 이번 사고는 그 신뢰 자체를 흔들어버린 셈이다.
BMW와 다른 길을 택했던 벤츠, 결과는 엇갈렸다

벤츠는 경쟁사보다 앞서 전기차 전용 단독 플랫폼 전략을 밀어붙였다. 미래지향적인 원-보우 실루엣, 실내를 가득 채운 하이퍼스크린, 부드러운 에어 서스펜션까지 초기 얼리어답터들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구성이었다.
문제는 내연기관 파생 모델로 접근한 BMW i5 등과 비교되면서 불거졌다. 디자인 호불호가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전기차 전용으로 처음부터 다시 그린 디자인이, 오히려 기존 럭셔리 세단다운 정체성을 기대했던 국내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채우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랜저와 겹쳐버린 가격, 벤츠의 대규모 할인도 한몫했다

신차 판매가 부진해지자 벤츠는 재고 소진을 위해 공격적인 할인에 나섰다. 벤츠코리아가 EQS를 대상으로 최대 2000만~3000만원 규모의 할인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정가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이는 같은 계열인 EQE의 중고 시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금 그랜저 하이브리드 최상위 트림 캘리그래피 가격이 5266만원 수준이다. EQE 중고 시세(5790만~6800만원)와 사실상 겹치는 구간이다.
1억원 넘던 프리미엄 전기 세단이 국산 세단 최상위 트림과 나란히 놓이게 된 셈인데, 원래 감가가 완만하기로 유명한 벤츠 라인업 중에서도 유독 가파른 하락세라는 점이 눈에 띈다.
신뢰 회복이 먼저, 가성비만 보고 뛰어들긴 이르다

이번 EQE 사례는 프리미엄 브랜드의 본질이 화려한 겉모습이나 로고값이 아니라, 소비자가 안심하고 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걸 다시 보여준다. 다만 벤츠가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완성도 자체를 의심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배터리 안전성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와 제조사 차원의 신뢰 회복 노력이 뒤따른다면, 벤츠 전동화 라인업이 다시 자리를 잡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 있다.
다만 지금 가격만 보고 중고 EQE를 구매하려 한다면 배터리 제조사와 관리 이력, 화재 예방 관련 최신 조치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같은 시기 벤츠 EQS도 3년 만에 신차 대비 50~55% 수준까지 감가된 사례가 나오고 있어, 벤츠 전기차 전반에 걸친 흐름이라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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