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지정학적 위기 고조로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반복되는 가운데 파나마운하를 경유한 미국산 원유가 2022년 9월 이후 처음 국내에 들어왔다. 정부가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에 힘을 싣자 비용 문제로 외면받던 파나마운하 항로가 재개되고 홍해를 통한 원유 공급도 가시화해 한국의 에너지 수급 체계 재편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GS칼텍스의 원유를 실은 아프라막스급 유조선 시터틀호가 19일 여수항에 입항했다. 아프라막스급은 적재량 8만~12만 톤급 중형 선박으로 30만 톤인 초대형유조선(VLCC)이 진입하기 어려운 좁은 수로나 수심이 얕은 항만까지 접근할 수 있다.
시터틀호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항에서 원유를 선적한 뒤 파나마운하를 통과해 약 한 달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유조선에는 약 80만 배럴의 원유가 실린 것으로 전해졌다.
선박 추적 정보 업체 케이플러에 따르면 미국 걸프만에서 파나마운하를 거쳐 한국으로 원유를 수송한 것은 2022년 9월 이후 약 3년 7개월 만이다. 호르무즈해협이 열려 있던 평시에 국내 정유사들은 주로 중동에서 VLCC를 통해 원유를 들여왔다.
배를 꽉 채운 상태의 VLCC는 수심이 얕은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산 원유를 도입할 때도 VLCC에 실어 대서양을 건너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이란 전쟁으로 중동 노선 운항이 차질을 빚자 파나마운하가 다시 대안으로 부상했다.
정부도 “싼 맛에 한곳(중동)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공급망 다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최근 “이번 분쟁이 종료되더라도 비중동산 원유 도입 확대와 수송 루트 다원화 기조를 지속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시터틀호에 이어 약 100만 배럴을 선적할 수 있는 수에즈막스급 유조선 한 척도 한국과 계약을 맺고 휴스턴을 출발해 최근 파나마운하 입구에 도착했다.
한때 정부가 운항 자제를 권고했던 홍해 경로도 다시 가동된다. SK해운 소속 VLCC는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항에서 원유를 싣고 홍해와 바브엘만데브해협을 통과해 현재 인도양을 항해 중이며 보름 뒤 한국 도착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