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주역들의

뒷 얘기입니다


4·19 당시 서울대 학생위원장이던 안병규는 1960년 10월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난국수습의 길’에서 1960년 7·29총선 이후 탄생한 국회가 혁명을 배반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10년 뒤 그는 “최고영도자가 강인하고도 확고한 체제 개혁 의지로 펼치는 10월 유신은 곧 우리가 염원해 온 완전혁명이며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극 참여키로 했다”라고 한 신문에 기고했다. 안병규는 1980년대 들어 12·12쿠데타 세력의 국보위에서 문공분과 위원으로 참여했고, 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민정당 공천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제5공화국 국정 방향과 4·19정신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족통일연맹 간부였던 이영일(서울대)은 5·16 이후 구속됐으나 1980년 민정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국회 문공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0년 11월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해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던 윤식(서울대)도 5·16 직후에는 감옥에 수감됐으나 유신 이후 유정회의 일원이 됐다. 유정회는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의장이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추천으로 선거 없이 뽑힌 국회의원들의 교섭단체로, 국회에서 사실상 대통령의 친위대 구실을 했다.

‘4·19 선언문’을 작성한 이수정(서울대)은 유신 이후 문공부 해외공보관, 1980년대에는 대통령 정무비서관과 청와대 대변인 등을 지냈다. 황선필(서울대)은 박정희 정권 때 홍보조정관, 전두환 정권 때는 청와대 대변인을 각각 지냈다. 이세기, 염길정, 조남조, 윤석순, 정남, 정창화 등 4·19 학생 지도부는 모두 전두환 정권 시절 민정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