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전하다 간혹 추월하려고 사이드미러를 보면 달려오는 후속 차량의 존재와 나와의 거리를 인식하고선 추월 또는 잠시 대기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데, 조금 전 그 짧은 순간 잠깐 보았던 거울 속 그 차의 이미지가 예전의 어떤 특정한 차종을 떠올리게 할 때가 많다. 최근 들어 부쩍.
분명 지금쯤에는 그 개체 수가 거의 없어져 버린 90년대 초반의 차임에도 그때 그 시절, 그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곳, 같이 탔었던 사람들, 함께 했던 기억들까지 그 짧은 순간에 한꺼번에 밀려오곤 한다. '그 차가 여태 달린다고?' 하면서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반가움에 다시금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기억 속 그 차가 아닌 그저 흔히 보이는 요즘의 차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헛것이 자주 보이네..
하지만 조금 전에 잠깐 시각 정보로 입력된 그 이미지는 이내 오랜 세월 동안 로딩한 적 없던 머릿속 기억을 여기서 한 조각, 저기서 한 조각 불러내 어떤 한 지점에다 재생산해낸다.
시간 순서의 저장 프로세스 따위는 무시, 무분별하고 무작위적으로 합성되는 이미지들, 또는 쇼츠 영상처럼 마구 떠오르는 단편적인 순간순간의 기억들. 잠시 감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 때로 돌아가 있는 듯하다.
이렇다 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던 내 젊은 날, 기뻤던 순간보다는 지금까지도 간간이 떠오르는 이불킥 흑역사의 순간에 몸서리치며, 그때 그 순간 그 직전에 차라리 그러지 말고 이랬더라면~ 하며 마치 지난주 있었던 일처럼, 마치 방금 있었던 일처럼,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돌아가 91년식 그 차에 앉아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글로 풀어 설명하자면 이다지도 장황한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실상 추월할까 말까 하던 그저 5초 남짓 한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차는 다름 아닌 최근의 현대차들이다.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 등등. 여러 세대를 거쳐 오면서 첨단 장비들 잔뜩 얹고서 최신 디자인으로 다듬어진, 그러나 익숙한 이름 뒤에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더 달고 다니는 새 차들. cn7, 디 에지, gn7.. 이게 다 뭐람~



** 90년대의 현대차는 쏘나타 2.0 GLSi, 1.8 GLi, 엑셀 GLSi, GL 등 모델명 아래로 배기량 또는 트림별 구분만 있던 때라 그 시절에 익숙한 나 같은 아재에겐 코드명까지 붙여줘야 하는 생소한 이름의 요즘 차들.
참고로 당시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던 MPi(Multi-Point injection 다중 연료 분사식 엔진) 방식을 채택한 쏘나타 2.0과 1.8, 엑셀 1.5 모델에는 i를 붙였지만 카뷰레터 방식의 엑셀 1.3 모델은 'i'가 붙지 않아 그냥 1.3 GL이다.
집에 차는커녕 자전거도 없던 어린 시절, 자기 아빠 차 자랑하던 동네 친구 놈이 있었는데 여기저기 다니며 뻐기는 것까진 좋았지만 '우리 아빠 차는 엑셀 GLi'라는 말도 안 되는 엠블럼 튜닝 따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름 1세대 덕후였던지라 국내 일간지 전면광고와 메이커별 팸플릿을 두루 섭렵하며 각종 제원까지 훤~히 꿰고 있던 나에겐 '너 자꾸 그러면 우리 아빠 차 안 태워줘~'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감수하고라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오류였기 때문이다.
눈 한번 질끈 감고 얻어 탈 수도 있었지만 마치 위인전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력, 생사여탈의 위기 앞에서 후일을 도모했던 갈릴레오. '내가 지금 죽으면 진실도 함께 죽는다'라며 곡학아세의 길을 갔던 그와는 달리, 신숙주가 되기보다 사육신이 되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결국 증거자료를 들이밀며 참교육 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 안 가본 놈이 가본 놈을 이긴다지만, 서울 가본 놈이 서울 안 가본 놈보다 정작 서울을 더 모르는 아이러니란.. 어쨌든 TMi for GLi.
하긴, 1993년 쏘나타2 출시를 기점으로 중고차 딜러들이 혼란을 막기 위해 그 이전 구형 모델에다 y2, y3 등 메이커의 개발코드를 가져다 쓰며 공식, 비공식적으로 구분 짓던 때부터 어쩌면 공공연한 일이었나 보다.
그보다도 세그먼트별 디자인 차별화도 뚜렷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현대차도 벤츠, BMW, 아우디 등 독일 3사를 위시하여 볼보, 렉서스, 테슬라, 혹은 자사의 제네시스를 포함한 프리미엄 브랜드들의 행보에 동참한 듯.
사이즈와 옵션 차이 외에는 누가 봐도 비슷한 디자인 패턴인 '패밀리룩' DNA를 공유, 서로 빼닮은 프런트 디자인이다. 멀리서 대충 보면 방금 봤던 그 차가 '아반떼 cn7'이었는지 '쏘나타 디 에지'였는지, 혹은 '그랜저 gn7 하~이~브~리~~~드~'였는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런 와중에도 이들 차량의 비슷한 이미지, 특별히 보닛 위 라인의 공통점은 어쩌면 보다 오래전 존재했으며 오랜 기간 익숙했던, 그래서 이젠 아련하기까지 한 예전 어떤 모델을 연상시킨다. 공감하실 분이 계실까? '대우 에스페로' 바로 그 차다.

90년도 대우에서 출시한 에스페로. 공기저항 계수 CD(Coefficient of Drag) 개념을 처음 소개하며 0.29라는 수치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아직 생소한 용어에 효과는 별로이었던 듯.
그전만 해도 국내에서 군림하던 프린스, 수퍼살롱, 끝판왕 임페리얼 등 로얄 시리즈를 몰아내고 당시 국내 중형차 시장을 압도하던 y3 쏘나타에 대항마로 내놓으며 '쏘나타의 판매량을 반토막 내겠다'라며 자신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판매량으로 고전하다 5년 만에 단종된다.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토네의 디자인이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탓에 당시 보수적인(?) 국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였으며 자사의 상위 모델 프린스와도 포지션이 애매하게 겹치며 서로에게 악영향을 준 듯하다.


비슷한 시기 또다른 베르토네의 디자인 시트로앵 XM. 해치백이라는 것 말고는 거의 동일
** 반면 쏘나타는 y2 쏘나타의 F/L임에도 불구하고 에스페로의 등장 이후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이어서 93년 출시한 신차에도 이전 이름을 계승하여 쏘나타2로 명명하기에 이른다.
스텔라와 흡사한 디자인에 작명 센스까지 폭망이었던 1세대 '소나타(소나 타라고?)'의 실패를 딛고 권토중래, 절치부심하며 2세대 '쏘나타'라는 한 끗 차이의 이름과 함께 상품성으로 반격, 마침내 대우의 로얄 왕가를 무너뜨리며 중형차 시장을 석권, 흥행에 성공한다.
일반적으로 모델 체인지 때에는 이전 모델에서의 단점을 극복한다는 의미로 신개발 엔진, 섀시 등 완전히 새로운 설계임을 강조하며 새 이름을 쓰는 것이 차별화 차원의 전략이지만 대성공을 거둔 직전 모델 쏘나타의 브랜드 이미지와 인지도를 쉽사리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이때부터 국내 자동차 시장에 이른바 ~2 네이밍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갤로퍼2, 포터2, 누비라2, 크레도스2, 카니발2, 세피아2, 봉고2, 봉고3 등등.
'쏘나타'라는 이름은 이후 F/L 때 쏘나타3, 이어서 4세대부터는 이름 앞에 EF, NF, YF, LF 등의 개발코드만 바꿔 붙여가며 지금까지 롱런하기에 이른다. 이젠 제네시스 BH, DH 등 아예 개발코드를 트림명으로 쓰기도.
y2의 페이스리프트지만 DOHC 엔진, ABS 탑재 등 모델 체인지급 변화를 가져온 y3 쏘나타
자동차의 개발, 생산, 판매, 다시 투자로 이어지는 순환구조에 더해 현대차 특유의 장점 하나가 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